독서광 :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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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4,727회 작성일 08-08-12 11:51본문
느리게 차근차근 걷자 한다,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 삶의 속도에 지쳐있는 당신을 위한 책
"무엇보다 자동차는 공존의 문화를 파괴한다. … 자동차에 올라타면 사람들은 자동차가 된다. 옆으로 지나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다. 그래서 서로 부딪히고 나서 보니 안에 사람이 들어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는 식이다."
정말 그렇다. 사람이 자동차가 된다. 어떤 종류의 무감각. 나는 이걸 첫 교통사고가 났던 고등학교 3학년 때 실감했다.
내가 탄 차는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고 3초쯤 뒤, 이른바 안전 수칙에 따라 좌회전을 했다. 3차로였고 양편 차선에선 당연히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 모든 차들이 멈춰야 했다. 그러나 속도를 전혀 줄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차가 그대로 질주했고 좌회전을 하고 있던 우리 차를 받았다. 그 차는 충격으로 튕겨져 다시 맞은 편 차량에 부딪힌 다음 한참을 뱅글뱅글 돌고서야 멈추었다.
불과 1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모든 것이 멈췄다. 모르긴 몰라도 차 안에 있던 사람들도 아마 입을 딱 벌렸을 것이다. 사고가 나기엔 너무도 쾌청한 아침 시간이었다. 잠시 후 사고 원인이었던 질주 차량의 운전자가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한 문장은 '아 저기 사
람이 타고 있었지'였다.
정말이지, 좀 이상하다. 길을 걸을 때 누군가 내 앞에서 천천히 걷고 있을 때 앞질러가면서 비키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위협적으로 몸을 들이미나? 함께 걷는 사람이 걸음이 좀 서툴다고 해서 "집에 처박혀 있으라!"고 윽박지르나?
그렇게 까진 하지 않을 것 같다. 일례로 산을 오를 때 누군가 힘에 겨워 걸음이 느려지면 생판 초면이어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며 격려한다. 물도 나눠주고 힘내라고 박수도 쳐준다.
도로에서 그런 광경은 보기 힘들다. 기이한 일이다. 산에 다니는 사람과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은 애초에 다른 사람들인가? 그럴 리가 없다. 산 타는 사람은 산만 타고 차 타는 사람은 차만 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오가는 길인데 왜 이렇게 다를까.
이런 분석은 어떨지. 걸을 때와는 달리, 차를 타면 속도가 생긴다. 더 많이 움직일 수 있게 됐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거리를 이동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효율이라는 개념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더 빨리' '더 많이'가 중요해진다. '무엇을' '어떻게'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으로 치부된다. 얼마나 더 빨리 단기간 내에 건물을 짓는지, 얼마나 더 많은 점수를 내는지가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된다. 사람들의 삶은 갈수록 가속화되고 빨리 지어진 건물은 무너지고 더 많은 점수를 내라고 강요당하던 아이들은 건물 아래로 뛰어내린다.
이게 다 자동차 때문이라고 하면 좀 우스워지겠지만 위협하듯 경적을 울리고 상소리를 내뱉는 행동보다는 이치에 닿는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느끼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속도에 떠밀려 무력하게 흘러간다.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라고 저항 해봐도 역부족이다. 개인의 힘으로 이 거대한 급류를 거슬러 오르기란, 더군다나 그 흐름을 바꾼다니 나폴레옹이 와도 불가능하다고 도리질칠 게다.
속도는 속도를 만들어내고 사람은 제가 만들어낸 속도에 당하지 못한다. 우울한 결말이다. 더 우울한 결말은 자기가 그렇게 사는 게 억울하고 분해서 남들까지 그렇게 살라고 강요하는 거다. 그렇게 미친 급류에 휩쓸려 휘둘리다가 제게 주어진 생이 다했을 때야 '내가 무얼 위해 살았던 거지'라고 중얼거리며 눈물이나 흘린다.
버리며 달린다 버려야 달린다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하는 길 위의 선언이 바로 자전거다. 자전거를 타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마음이겠냐만은,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을 쓴 홍은택에 따르면 자전거를 타다 보면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80일 동안 혼자 자전거를 타고 미국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달린 그는 자전거 여행의 가장 큰 의미가 욕심 감량이었다고 말한다. 바리바리 싸왔던 짐을 돌려보내거나 나눠주면서, 다른 라이더의 잘못된 조언으로 길을 한참 에둘러 달리면서, 바퀴의 펑크를 메우는 등 자전거를 직접 손보면서 그는 빨리 달리고 싶고 쉽게 가고 싶고 많은 걸 소유하고 싶은 마음들을 버린다.
그렇게 버리면서, 달린다. 그렇게 버려야만 달릴 수 있다. 책에는 그 길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길 위의 다종다양한 경험들(열한 번의 펑크, 100마리도 넘는 개들의 추격 등등)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을 맛깔스럽고 익살스럽게 풀어냈다. 버려야 하는데 버리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그러면서 거듭 배우는 과정은 꼭 나를 보는 것처럼 익숙하고 인간적이다.
친구들이 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에도 덤덤했는데 이 책을 읽고는 자전거를 무척 타고 싶어졌다.
그가 자전거 위에서 그랬듯 나도, 좀 버리고 싶다. 무언가를 빨리 성취하고픈 조급함, 많은 돈을 벌고 싶은 물욕, 겉보기에 그럴듯한 사람이 되고픈 허세…. 대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정직하게 내 두 발로 움직인 만큼만 전진하는 삶을 상상해 본다. 느리게 조금씩, 포기하지만 않으면 돼. 그걸로 충분해, 다독다독. 어깻죽지가 조금 가벼워지는 듯도 하다.
송 민 성 (본원 객원기자
- 삶의 속도에 지쳐있는 당신을 위한 책
"무엇보다 자동차는 공존의 문화를 파괴한다. … 자동차에 올라타면 사람들은 자동차가 된다. 옆으로 지나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다. 그래서 서로 부딪히고 나서 보니 안에 사람이 들어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는 식이다."
정말 그렇다. 사람이 자동차가 된다. 어떤 종류의 무감각. 나는 이걸 첫 교통사고가 났던 고등학교 3학년 때 실감했다.
내가 탄 차는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고 3초쯤 뒤, 이른바 안전 수칙에 따라 좌회전을 했다. 3차로였고 양편 차선에선 당연히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 모든 차들이 멈춰야 했다. 그러나 속도를 전혀 줄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차가 그대로 질주했고 좌회전을 하고 있던 우리 차를 받았다. 그 차는 충격으로 튕겨져 다시 맞은 편 차량에 부딪힌 다음 한참을 뱅글뱅글 돌고서야 멈추었다.
불과 1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모든 것이 멈췄다. 모르긴 몰라도 차 안에 있던 사람들도 아마 입을 딱 벌렸을 것이다. 사고가 나기엔 너무도 쾌청한 아침 시간이었다. 잠시 후 사고 원인이었던 질주 차량의 운전자가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한 문장은 '아 저기 사
람이 타고 있었지'였다.
정말이지, 좀 이상하다. 길을 걸을 때 누군가 내 앞에서 천천히 걷고 있을 때 앞질러가면서 비키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위협적으로 몸을 들이미나? 함께 걷는 사람이 걸음이 좀 서툴다고 해서 "집에 처박혀 있으라!"고 윽박지르나?
그렇게 까진 하지 않을 것 같다. 일례로 산을 오를 때 누군가 힘에 겨워 걸음이 느려지면 생판 초면이어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며 격려한다. 물도 나눠주고 힘내라고 박수도 쳐준다.
도로에서 그런 광경은 보기 힘들다. 기이한 일이다. 산에 다니는 사람과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은 애초에 다른 사람들인가? 그럴 리가 없다. 산 타는 사람은 산만 타고 차 타는 사람은 차만 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오가는 길인데 왜 이렇게 다를까.
이런 분석은 어떨지. 걸을 때와는 달리, 차를 타면 속도가 생긴다. 더 많이 움직일 수 있게 됐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거리를 이동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효율이라는 개념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더 빨리' '더 많이'가 중요해진다. '무엇을' '어떻게'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으로 치부된다. 얼마나 더 빨리 단기간 내에 건물을 짓는지, 얼마나 더 많은 점수를 내는지가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된다. 사람들의 삶은 갈수록 가속화되고 빨리 지어진 건물은 무너지고 더 많은 점수를 내라고 강요당하던 아이들은 건물 아래로 뛰어내린다.
이게 다 자동차 때문이라고 하면 좀 우스워지겠지만 위협하듯 경적을 울리고 상소리를 내뱉는 행동보다는 이치에 닿는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느끼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속도에 떠밀려 무력하게 흘러간다.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라고 저항 해봐도 역부족이다. 개인의 힘으로 이 거대한 급류를 거슬러 오르기란, 더군다나 그 흐름을 바꾼다니 나폴레옹이 와도 불가능하다고 도리질칠 게다.
속도는 속도를 만들어내고 사람은 제가 만들어낸 속도에 당하지 못한다. 우울한 결말이다. 더 우울한 결말은 자기가 그렇게 사는 게 억울하고 분해서 남들까지 그렇게 살라고 강요하는 거다. 그렇게 미친 급류에 휩쓸려 휘둘리다가 제게 주어진 생이 다했을 때야 '내가 무얼 위해 살았던 거지'라고 중얼거리며 눈물이나 흘린다.
버리며 달린다 버려야 달린다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하는 길 위의 선언이 바로 자전거다. 자전거를 타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마음이겠냐만은,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을 쓴 홍은택에 따르면 자전거를 타다 보면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80일 동안 혼자 자전거를 타고 미국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달린 그는 자전거 여행의 가장 큰 의미가 욕심 감량이었다고 말한다. 바리바리 싸왔던 짐을 돌려보내거나 나눠주면서, 다른 라이더의 잘못된 조언으로 길을 한참 에둘러 달리면서, 바퀴의 펑크를 메우는 등 자전거를 직접 손보면서 그는 빨리 달리고 싶고 쉽게 가고 싶고 많은 걸 소유하고 싶은 마음들을 버린다.
그렇게 버리면서, 달린다. 그렇게 버려야만 달릴 수 있다. 책에는 그 길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길 위의 다종다양한 경험들(열한 번의 펑크, 100마리도 넘는 개들의 추격 등등)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을 맛깔스럽고 익살스럽게 풀어냈다. 버려야 하는데 버리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그러면서 거듭 배우는 과정은 꼭 나를 보는 것처럼 익숙하고 인간적이다.
친구들이 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에도 덤덤했는데 이 책을 읽고는 자전거를 무척 타고 싶어졌다.
그가 자전거 위에서 그랬듯 나도, 좀 버리고 싶다. 무언가를 빨리 성취하고픈 조급함, 많은 돈을 벌고 싶은 물욕, 겉보기에 그럴듯한 사람이 되고픈 허세…. 대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정직하게 내 두 발로 움직인 만큼만 전진하는 삶을 상상해 본다. 느리게 조금씩, 포기하지만 않으면 돼. 그걸로 충분해, 다독다독. 어깻죽지가 조금 가벼워지는 듯도 하다.
송 민 성 (본원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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