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네 태그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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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5,113회 작성일 08-05-16 11:38본문
여자는 꼭 몸이 가느다랗고 가슴이 커야 해? 여자들은 운동장에서 뛰고 구르면서 자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여자는 섹스의 ㅅ도 모르는 척 조신하게 굴어야 하는 거야? 야오이를 보면 변태라고? … 그런데 여자는 꼭 남자만 좋아해야 하는 거야?
예민하고 명석한 소녀들이라면 한 번쯤 이런 물음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나 또한 예민하고 명석하기로는 둘째라면 서운한 소녀였던 탓에 삼천일백서른두 가지도 넘는 물음표를 안고 있었다. 물론 적극적이기까지 했던 지라 아주 어렸을 때는 천진하게 주변 어른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여자는 결혼하기 전에 섹스를 하면 왜 욕을 먹나요?"
"우리 여자애들은 왜 체육수업 시간에는 늘 응원만 하나요?"
그렇지만 한 번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답을 들어본 기억은 없다. 부모님은 어쩌다 함께 보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키스신만 나와도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고, 선생님들은 브래지어를 입지 않거나 끈런닝을 입으면 조신하지 못하다고 난리를 치면서도 정작 성폭력을 당했을 때 대처법이나 섹스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슬쩍 얼버무리거나 "나중에 다 알게 된다. 지금은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호통 치기 일쑤였다.
이런 질문을 가지는 내가 잘못된 것인지,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지,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어떻게 그 경험과 고민들을 지나갔는지, 나는 또 어떻게 이 질문들을 풀어나가야 할지 등등 답 없는 물음표들에 나는 곧잘 불안하고 막막해졌고 목이 말랐다.
그럴 때 나는 곧잘- 언니가 한 명쯤 있었으면, 간절해지곤 했다.
"언니들도 그랬어."
나의 고민과 질문에 귀 기울여주고 공감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런 따뜻하고 친절한 언니 말이다. 인터넷 지식검색처럼 정답을 척척 내놓는 만물박사가 아니어도 좋다. "나도 그런 경험을 한 적 있지."라며 옛날이야기 들려주듯 차분히 속삭여주는 언니가 있었다면 내 목마른 불안함은 훨씬 줄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지난 4월 출간된 <언니네 태그놀이>(언니네트워크 지음·또하나의문화 펴냄)는 물음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그 시절, 내가 간절히 바라던 언니 같은 책이다.
책에는 다양한 "언니"들이 등장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병적인 다이어트를 경험"한 한 언니는 몸집이 큰 사람들을 게으르거나 비정상인 부류로 취급하는 폭력적 시선과 날씬한 사람의 이점을 모두 경험하면서 "자신의 몸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우친다. 물론 몸에 대한 "무수한 측정기들의 폭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는 고백도 잊지 않는다.
한 언니는 선생님들이 "남자 아이들이 지금은 우습지만 고3만 되어 봐라. 금방 여자 애들 다 제치고 올라간다."라는 말을 주문 걸듯 반복하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린다. "남학생이 5점만 올려도 드디어 발동이 걸렸다고 호들갑을 떠는" 환경에서 남자 애들은 더욱 의기양양해지고, 여자 애들은 '여자는 안 돼.'라는 근거 없는 비아냥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여자 애들이 공부를 잘 하면 "남자 자리 뺏은 아이 취급"을 당하고, 그렇게 공부로 날고뛰던 여자 애들도 대학에 들어가면 "립스틱과 스커트에 열을 올리며 참한 여자"가 되려고 성화인지, 이해 부득이다.
학교에서 소문난 날라리였던 언니는 그때 자신이 마치 하나의 섬 같았다고 말한다. "집에서 사랑받지 못하거나, 비뚤어진 방식으로 사랑받거나, 폭력에 노출되어 있거나, 집안에 아무 문제가 없어도 마음이 외롭거나 한 아이들. 우리는 한겨울의 외딴 섬을 부유하듯 늘 불안했다." 원조 교제의 유혹에 흔들리기도 하고, 날라리 친구들끼리 'X언니'(서로 친밀하게 지내는 언니 동생 사이)를 맺으며 비빌 언덕을 만들기도 한다.
정해진 대로 살지 않아도 괜찮아
스포츠에 열광하는 한 언니는 왜 여자 아이들에게 운동은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지 묻는다. 남자 아이들이 축구공과 글러브를 선물 받는 동안 여자 아이들은 바비 인형을 선물 받는다. 여자 애들이 코트에서 농구라도 해볼라치면 남자 애들이 '진짜 농구'를 하겠다고 쫓아낸다. 여자들이 자신이 운동을 좋아하는지 깨닫는 것부터 실제로 운동장에 나가 운동을 즐기기까지, 쉬운 것은 하나도 없다.
성 정체성을 탐색하는 소녀들을 위한 언니들의 이야기도 있다. 늘 "아직도 남친이 없어?"라는 질문을 들었던 언니는 "때때로 벌떡 일어나서 나는 레즈비언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가 있다"고 말한다. 이 사회는 동성애자는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고, 언어마저 이성애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언니의 지론. "남친(여친) 있니?" 대신 "사귀는 사람 있니?"라고 물으면 다른 정체성을 배제하지 않을 수 있다.
<언니네 태그놀이>에는 이처럼 다양한 여자들의 경험과 고민들이 주르륵 이어진다. 나와 비슷한 고민과 경험을 한 언니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 보면 어느 새 힘도 나고 마음도 편안해진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었어! 함께 투덜거리는 동지를 만나 반갑기도 하다.
역시나 툴툴거리고, 넘어지면서 걸어가고 있는 언니들의 글은 부담 없이 친숙하고 쫀득쫀득하다. 관계, 몸, 성장 등 소재와 주제는 제각각이지만 글들은 '꼭 세상이 정해준 레시피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공통적으로 담고 있다.
각 글에는 제목 대신 태그가 붙어 있다. 태그는 글에서 인상적인 단어나 주제와 관련된 열쇠말이다. 순서대로 읽거나 관심 있는 카테고리의 태그부터 읽어나가도 좋다. 각 글에는 비슷한 주제의 태그들이 붙어있어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며 읽을 수도 있다.
송 민 성 (본원 객원기자)
예민하고 명석한 소녀들이라면 한 번쯤 이런 물음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나 또한 예민하고 명석하기로는 둘째라면 서운한 소녀였던 탓에 삼천일백서른두 가지도 넘는 물음표를 안고 있었다. 물론 적극적이기까지 했던 지라 아주 어렸을 때는 천진하게 주변 어른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여자는 결혼하기 전에 섹스를 하면 왜 욕을 먹나요?"
"우리 여자애들은 왜 체육수업 시간에는 늘 응원만 하나요?"
그렇지만 한 번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답을 들어본 기억은 없다. 부모님은 어쩌다 함께 보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키스신만 나와도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고, 선생님들은 브래지어를 입지 않거나 끈런닝을 입으면 조신하지 못하다고 난리를 치면서도 정작 성폭력을 당했을 때 대처법이나 섹스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슬쩍 얼버무리거나 "나중에 다 알게 된다. 지금은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호통 치기 일쑤였다.
이런 질문을 가지는 내가 잘못된 것인지,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지,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어떻게 그 경험과 고민들을 지나갔는지, 나는 또 어떻게 이 질문들을 풀어나가야 할지 등등 답 없는 물음표들에 나는 곧잘 불안하고 막막해졌고 목이 말랐다.
그럴 때 나는 곧잘- 언니가 한 명쯤 있었으면, 간절해지곤 했다.
"언니들도 그랬어."
나의 고민과 질문에 귀 기울여주고 공감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런 따뜻하고 친절한 언니 말이다. 인터넷 지식검색처럼 정답을 척척 내놓는 만물박사가 아니어도 좋다. "나도 그런 경험을 한 적 있지."라며 옛날이야기 들려주듯 차분히 속삭여주는 언니가 있었다면 내 목마른 불안함은 훨씬 줄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지난 4월 출간된 <언니네 태그놀이>(언니네트워크 지음·또하나의문화 펴냄)는 물음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그 시절, 내가 간절히 바라던 언니 같은 책이다.
책에는 다양한 "언니"들이 등장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병적인 다이어트를 경험"한 한 언니는 몸집이 큰 사람들을 게으르거나 비정상인 부류로 취급하는 폭력적 시선과 날씬한 사람의 이점을 모두 경험하면서 "자신의 몸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우친다. 물론 몸에 대한 "무수한 측정기들의 폭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는 고백도 잊지 않는다.
한 언니는 선생님들이 "남자 아이들이 지금은 우습지만 고3만 되어 봐라. 금방 여자 애들 다 제치고 올라간다."라는 말을 주문 걸듯 반복하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린다. "남학생이 5점만 올려도 드디어 발동이 걸렸다고 호들갑을 떠는" 환경에서 남자 애들은 더욱 의기양양해지고, 여자 애들은 '여자는 안 돼.'라는 근거 없는 비아냥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여자 애들이 공부를 잘 하면 "남자 자리 뺏은 아이 취급"을 당하고, 그렇게 공부로 날고뛰던 여자 애들도 대학에 들어가면 "립스틱과 스커트에 열을 올리며 참한 여자"가 되려고 성화인지, 이해 부득이다.
학교에서 소문난 날라리였던 언니는 그때 자신이 마치 하나의 섬 같았다고 말한다. "집에서 사랑받지 못하거나, 비뚤어진 방식으로 사랑받거나, 폭력에 노출되어 있거나, 집안에 아무 문제가 없어도 마음이 외롭거나 한 아이들. 우리는 한겨울의 외딴 섬을 부유하듯 늘 불안했다." 원조 교제의 유혹에 흔들리기도 하고, 날라리 친구들끼리 'X언니'(서로 친밀하게 지내는 언니 동생 사이)를 맺으며 비빌 언덕을 만들기도 한다.
정해진 대로 살지 않아도 괜찮아
스포츠에 열광하는 한 언니는 왜 여자 아이들에게 운동은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지 묻는다. 남자 아이들이 축구공과 글러브를 선물 받는 동안 여자 아이들은 바비 인형을 선물 받는다. 여자 애들이 코트에서 농구라도 해볼라치면 남자 애들이 '진짜 농구'를 하겠다고 쫓아낸다. 여자들이 자신이 운동을 좋아하는지 깨닫는 것부터 실제로 운동장에 나가 운동을 즐기기까지, 쉬운 것은 하나도 없다.
성 정체성을 탐색하는 소녀들을 위한 언니들의 이야기도 있다. 늘 "아직도 남친이 없어?"라는 질문을 들었던 언니는 "때때로 벌떡 일어나서 나는 레즈비언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가 있다"고 말한다. 이 사회는 동성애자는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고, 언어마저 이성애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언니의 지론. "남친(여친) 있니?" 대신 "사귀는 사람 있니?"라고 물으면 다른 정체성을 배제하지 않을 수 있다.
<언니네 태그놀이>에는 이처럼 다양한 여자들의 경험과 고민들이 주르륵 이어진다. 나와 비슷한 고민과 경험을 한 언니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 보면 어느 새 힘도 나고 마음도 편안해진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었어! 함께 투덜거리는 동지를 만나 반갑기도 하다.
역시나 툴툴거리고, 넘어지면서 걸어가고 있는 언니들의 글은 부담 없이 친숙하고 쫀득쫀득하다. 관계, 몸, 성장 등 소재와 주제는 제각각이지만 글들은 '꼭 세상이 정해준 레시피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공통적으로 담고 있다.
각 글에는 제목 대신 태그가 붙어 있다. 태그는 글에서 인상적인 단어나 주제와 관련된 열쇠말이다. 순서대로 읽거나 관심 있는 카테고리의 태그부터 읽어나가도 좋다. 각 글에는 비슷한 주제의 태그들이 붙어있어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며 읽을 수도 있다.
송 민 성 (본원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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